2014년 1월 6일 월요일

류덕의 차잡설 01. 육우(陸羽)와 다경(茶经)을 알아보자 -1-



육우의 상


 오늘은 월드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있는 다경의 저자 육우에 대해서 알아 보자.다경《茶》은 중국 당나라 시대 사람인 육우가 지은 책으로, 역사상 최조의 전문 서적이라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육우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육우는 고기를 얻으려고 기르는 소이다

 육우 陸羽(733年-804) 당나라 시대 사람으로, 중국 후베이성 출신이다.

 이 사람이 유명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대로 다경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차에 관한 문헌 가운대에서 다경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다성(茶圣), 다선(茶仙), 다신(茶神) 등으로도 불리우는 인물이다. 

 이 육우라는 사람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징링 용개사의 주지승이었던  지적 선사(竟陵龙盖寺主持僧智积禅师, 징링은 현재 중국 후베이성의 티엔먼시) 서호(西湖,후베이성에도 서호가 있다) 부근에서 3살의 육우를 주웠다고 한다.   

  천애고아였던 육우는 나중에 역경을 공부하여 점을 봐서, 괘를 가지고 자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얻은 것이 점(漸)괘였는데, 그 효 풀이 가운데 「鴻漸於陸,其羽可用儀,吉。」(기러기가 땅위에서 천천히 날아가니, 그 깃은 예물로 쓸 수 있다. 길하다) 라는 풀이를 보고 ,성을 육(陸)으로, 이름을 우(羽)로, 자는 홍점(鴻漸) 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용개사에서 육우는 글을 배우면서, 또한 차를 다루는 법도 배웠다 그렇지만 육우는 머리를 깎고 불법에 귀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육우는 12살때 용개사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다먹튀 (절에서 배운걸로 결국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 

 그리고 나서 극단으로 들어가서 연극을 배우기 시작한다. 생긴것도 별로이고 말을 더듬는  불리한 점이 많았으나, 유머와 재치가 있어서 어릿광대 역할로 상당히 성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중에 3권짜리 유머집인 谑谈》을 저술했다

 .746년, 징링 태수 리지우(李齐物) 연회를 열었는데연회 중에 육우의 연기를 보게되었고 ,  연기에  감탄하여 그에게 사서(诗书) 선물 하면서 티엔먼시베이훠먼산(天门西北火门山)의 조우푸즈(邹夫子)에게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소개를 해준다.

753년, 육우가 20세가 됬을때, 추이구오푸(崔国辅)를 알게되서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754년 봄, 추이공(崔公)과 작별을 고한 육우는 허난성(河南) 으로 오게된다. 육우는 빠똥쩐샹밍(巴东真香茗)등의 차를 맛보게 되고, 또 이곳에서 쓰추안성 등 타지의 차 생산 상황을 듣게 된다.

755년 여름, 육우는 고향인 찡링으로 돌아온다. 찡링현성(竟陵县城)에서 60리 떨어진 똥펑촌(东冈村)에 거주한다. 이 곳에서 여행에서 얻은 여러 정보와 차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기 시작하게 되며, 이 것이 차 전문 서적을 집필의 시발 점이된다.

756년, 안사의난으로 인해 난민들이 남하하게 되고, 육우또한 강을 건너게 된다.창쟝(长江) 중하류 유역과 화이허(淮河)우역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차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

760년, 육우는 후조우(湖州, 저쟝성 浙江省)에 오게 되는데(육우는 이 후조우를 자신의 두번째 고향으로 여기게 되며, 여기서 승려 쟈오란(皎然)과 함께 쭈산에 있는 먀오시사(杼山妙喜寺)에서 함께 기거를 하게 된다. 둘은 여기서 일생의 우정을 맺게 된다. 얼마 안있어 다시 절을 나온 육우는 저술에 집중을 하게 되고, 또한 여러 명승, 도사들과 사귀게 된다.

  육우와 쟈오란의 나이차이는 크게 났지만 (육우가 쟈오란보다 26살이 어렸다), 서로 알게 되고 나서는 나이고 뭐고 친구가 되었다. 
 쟈오란과의 깊은 우정은 그들이 가진 공통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어 보인다.
 둘은 당나라 시단의 스타였고, 필력이 남다른 작가였다. 또한 모두 유,불,도 삼교를 공부했었으며, 특히 차예에 대한 애호 차덕후 가 남달랐다. 또한 독신주의자였으며, 속세를 떠나 은거를 택한 인물들 이었다. 이들의 교류는 그들이 세상을 뜰 때까지 수십년 동안 계속되었다.
 (학식, 가치관, 취미가 이렇게 잘 맞는데 친한 친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약 그들이 남녀관계였다면 또한 좋은 부부가 되었을 것이다)

육우와 쟈오란의 즐거운 한때. 쟈오란은 술대신 차를 마시자고 주장했다.


765년, 육우는 32주, 군의 실제 고찰자료와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최초의 다경《茶经》초고를 완성한다.

780년, 육우는 쟈오란의 지지아래 다경《茶经》을 발간하게 된다.

781년, 육우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면서 당현종(唐德宗)를 그를 등용하려 한다. 그러나 육우는 2번의 부름을 거절한다. 육우는 일생동안 관직에 임하지 않았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799년, 육우는 칠순이 다되어서 후조우(湖州)가 그리웠졌다. 그래서 후조우의 칭탕먼 밖에 있는 칭탕 별장(湖州青塘门外青塘别业)으로 가서 만년을 즐겁게 보낸다.  804년에 작고하는데, 이때가 72세였다. 



 육우는 일생동안 권세있는 귀족들을 경멸하였으며, 재물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육간지...) 자연과 함께 하는 ,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고 한다. 《전당시,全唐》(청나라때 저술된 당나라 시 모음집)  육우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진다.

不羡黄金罍,
不羡白玉杯,
不羡朝入省,
不羡暮登台;
千羡万羡西江水,
曾向竟凌城下来。


황금으로 된 술병이 부럽지 않고

백옥으로 술잔이 부럽지 않고

아침에 문안 받는 것이 부럽지 않으나

천번 만번 부러운 것은 서강의 물이니,

이미 찡링성(육우의 고향,호남성) 아래로 흘러 왔구나.

후베이성에 있는 육우 기념관의 설경



 육우는 일생동안 시와 문학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저서인 '다경' 당대와 당대 이전의 차와 관련된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저서로서,후대에 이르러서는 산업의 근간이 된 저서로 칭송 받고있다.  (책한권 잘써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케이스)

 다음 시간에는 그의 저작인 다경을 살펴 보자. 

이 글은 차 커뮤니티 투티에 기고한 글입니다.